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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말 바루기] ‘있음’인가 ‘있슴’인가?

독자에게서 e메일을 받았다. ‘있습니다’ ‘없습니다’를 명사형으로 쓸 때는 ‘있슴’과 ‘없슴’으로 표기해야 하는 것 아니냐는 질문이었다.   우선 ‘~읍니다’ ‘~습니다’에 대해 살펴보자. 지금은 ‘~습니다’로 쓰는 게 당연하게 생각될지 모르지만 과거의 글들을 보면 ‘~읍니다’로 적혀 있는 것이 있다. 나이 드신 분 가운데는 아직도 ‘~읍니다’를 사용하는 사람이 더러 있기도 하다. 예전에는 ‘~읍니다’와 ‘~습니다’를 함께 사용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1988년 표준어 규정이 바뀌었다. 모음 뒤에서는 ‘~ㅂ니다’, 자음 뒤에서는 ‘~습니다’를 쓰도록 개정됐다. ‘기쁩니다’ ‘학생입니다’는 모음 뒤에 ‘~ㅂ니다’가 붙은 경우다. ‘먹습니다’ ‘좋습니다’는 자음 뒤에 ‘~습니다’가 붙은 예다.   표준어 규정은 비슷한 발음의 몇 형태가 쓰일 경우 그 의미에 아무런 차이가 없고 그중 하나가 더 널리 쓰이면 하나의 형태만을 표준어로 삼도록 정하고 있다. 당시 ‘~읍니다’와 ‘~습니다’의 의미 차이가 명확하지 않고 입말에서는 일반적으로 ‘~습니다’가 더 널리 쓰인다는 판단 아래 ‘~습니다’를 표준어로 삼았다.   이제 ‘~습니다’가 자연스럽게 사용되다 보니 명사형으로 만들 때에도 ‘~ㅁ’을 붙여 ‘있슴’ ‘없슴’과 같이 ‘~슴’으로 써야 하는 것 아닌가 생각하는 사람이 있다. 그러나 명사를 만드는 어미 ‘~ㅁ’은 항상 그대로 적용되는 것이 아니다. ‘~ㅁ’은 모음 또는 ㄹ 받침으로 끝나는 말 뒤에 붙어 그 단어가 명사 역할을 하도록 만들어 준다. ‘끌리다’가 ‘끌림’, ‘만들다’가 ‘만듦’이 되는 것이 이런 예다.   하지만 자음으로 끝나는 말 뒤에 붙을 때에는 소리를 고르기 위해 매개 모음 ‘-으-’를 넣어 ‘-음’으로 쓴다. 따라서 ‘있다’는 ‘있음’, ‘없다’는 ‘없음’으로 적어야 한다.   다른 것은 자연스럽게 이루어지기 때문에 따로 기억하지 않아도 된다. 서술어는 ‘~습니다’, 명사형은 ‘~음’이라고 기억하면 큰 문제가 없다.우리말 바루기 표준어 규정 의미 차이 명사 역할

2025-02-04

[열린광장] 생활 영어에 필요한 '코드'

해가 바뀌면 누구나 한가지쯤은 새로 해보겠다고 결심을 한다.   미국에 사는 우리에게는 영어공부도 그중의 하나다. 영어공부를 해야겠다고 생각하면 처음 맞닥뜨리는 문제는 무엇으로 공부해야 하나 하는 것이다.   예전에는 서점의 영어책 코너에서 고민했다면 지금은 유튜브 여러 채널 중에서 고민한다.   학습자의 수준이나 공부하는 목적에 따라 달라질 수 있지만, 처음 혹은 다시 영어 회화를 공부하려고 하는 분들에게는 ‘영어 코드’가 크게 도움이 될 수 있다.   나는 어려서부터 교회에 다녔고, 음악을 좋아하게 되었다. 교회에는 여러 가지 음악 프로그램이 있기 때문에 내게 음악적인 재능이 전혀 없음을 금방 알게 되었다. 그래서 혼자 찬송가를 펴놓고 피아노로 반주 연습을 시작했다.   처음에는 멜로디만 치다가 나중에 알토, 테너, 베이스까지 같이 칠 수 있게 됐다. 수십 년이 지나자 쉬운 곡은 4부로 반주할 수 있게 됐다. 재능에 관계없이 반복 연습만으로도 가능했다. 그러나 아주 쉬운 곡도 악보가 없으면 칠 수 없었다.   영어 수업중 이런 내 고충을 이야기 했다. 그런데 내 수강생 중에 한국에서 미국에 와서 음악공부를 마치고, 고향 강원도에 가서 학원을 하면서 음악을 가르치려는 학생이 있었다. 내가 악보를 봐야만 피아노를 친다는 말에 그는 “그건 음악 코드를 몰라서 그렇다”고 간단하게 말했다.     다음날 인터넷에서 모든 코드를 프린트해 와서 대강 설명했다. 이것만 모두 외우면 찬송가를 거의 다 반주할 수 있다고 했다. 아! 처음부터 이 코드를 가지고 연습했으면 지금 어떻게 되었을까.   영어에도 음악의 코드와 같은 효과를 낼 수 있는 방법이 있다. 내가 음악 코드를 몰라 수십 년을 헤매었듯이 수많은 사람이 이 코드를 몰라 공부하다가 효과가 나지않아 중도에 포기하고 만다.   1세대 스타 영어강사로 유명했던 문단열씨는 그의 저서 ‘말 못하는 영어는 죽은 영어다’에서 회화영어는 ‘쓰리 S’로 공부해야한다고 주장했다. Structure(문장구조), Situation(상황), Sound(소리)를 말한다.   영어도 문장으로 이루어진 글이니 문장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문장구조를 알아야 한다. 처음 영어를 공부하는 사람들을 지치게 하고, 도중에 포기하게 했던 주범은 바로 문법이다.   그러나 문법을 따로 공부하지 말고 문장을 익히면서문장 속에서 문법을 익히는 방법은 문법을 따로 공부하는 것보다 더 재미있고 효과적으로 공부할 수 있게 한다. 문장구조는 문장을 이해하고 만들 수 있는 정도까지만 하면 된다.   그런 다음 상황이 설정된 내용으로 공부한다. 공부하는 목적에 따라 특화된 교재나 방법이 필요하겠지만 회화공부는 다양한 상황이 설정된 대화체로 말하는 것처럼 공부하는 것이 실제 생활에서 사용하기에 효과적이다.   마지막 소리는 말을 하듯이 크게 소리 내어 읽으며 연습해 머리가 기억하게 하는 것이다. 리듬을 익히면서 소리 내어 연습하면 몸에 영어가 체화되어 말할 수 있는 자신감도 생긴다.   이것이 내가 수십 년간 수천 명에게 생활 영어를 가르치면서 알게 된, 가장 효과를 볼 수 있는 ‘영어 코드’다.  최성규 / 베스트 영어 훈련원장열린광장 생활 영어 영어 코드 생활 영어 음악 코드

2025-02-04

[중앙시론] ‘영웅과 전설’ 프로젝트

청소년들이 뽑는 한인사회 모범인물 2024년에 훌륭한 분들이 선정되었는데 필자도 포함되는 영광을 안았다. 이 프로그램은 2022년 처음 시작되어 올해로 3회째를 맞았다.   사실 ‘영웅과 전설’ 프로그램이 무엇인지 잘 몰랐는데 전체적으로 이 모임을 주관하고 있는 크리스토퍼 이 감독과 부인과 만나 대화를 나누면서 참 의미 있는 프로그램이며 타 도시에도 전파되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영웅과 전설은 기존의 한인 1세 중심의 문화에서 완전히 벗어나 한인 차세대 특히 고등학생들이 주도하는 프로그램이다. 그들이 자신들에게 모범이 될 만한 인물들을 발굴하고 인터뷰를 통해 그분과의 만남과 배움을 서로 공유한 것을 글로 써서 기록으로 남기며 자신이 추구하는 사업이 있다면 비영리 단체를 만들어 스스로 주도해 나간다.   한인 청소년들이 한인사회 모범 인물을 찾아내고 인터뷰한 후 영웅과 전설로 선정한다는 독특한 방식이다. 물론 잡음이 없을 수는 없을 것이다. 영웅과 전설로 선정하는 기준이 무엇이며 왜 저 사람은 선정되고 다른 사람을 안 되는가? 비판의 목소리가 있을 수 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모든 것이 한인 차세대 청소년들이 스스로 정하고 선택한다는 과정과 방식이다. 그들의 기준으로 그들의 잣대로 한인사회 모범이 될 수 있는지를 판단하고 선정하기 때문이다.   나를 인터뷰한 H양은 어린 시절부터 한국 고전 무용을 배웠는데 백인 주류 사회에 비해 자신의 존재감이 작다고 생각하면서 점점 자신감을 잃기 시작했고 고등학교에 입학하는 14세 때부터는 모든 것을 포기하고 싶었다고 한다. 그런데 LA폭동을 배우면서 코리안 아메리칸 정체성의 중요성을 인식하게 되었고 필자를 인터뷰하면서 코리안 아메리칸 정체성 확립의 중요성과 자신감을 갖게 되었다고 한다.   영웅과 전설 프로그램을 주도하고 있는 크리스토퍼 이 감독은 9세 때 미국으로 이민 왔으며 주로 주류 사회에서 많은 활동을 해왔다고 한다. 전공은 건축가인데 다른 방면에도 탁월한 기량을 보여 감독, 작가, 엔터테인먼트 등 다 방면에서 국제적으로 인정받고 있는 인물이기도 하다. 영화 감독으로서도 아카데미 상 후보에 오를 정도로 인정받고 있는 감독이며 엔터테인먼트 사업에도 탁월한 능력이 있다고 한다.   30여 년 전 한미박물관 설립 때 이사진들과 힘을 합해서 함께 설립하자고 합의했는데 깨졌다는 이야기를 듣고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그리고 미시시피의 소도시 잭슨에서 필름 페스티벌을 성공적으로 개최하고 있다고 한다.   주류 사회에서 활동하던 이 감독은 이제 자신이 배운 모든 것을 차세대 한인 교육에 투자하고 있다. 그는 남의 힘을 빌리지 않고 자신이 노력해서 얻은 수익을 한인 청소년 차세대 교육에 적극 투자하고 있는 것이며 영웅과 전설 프로젝트는 바로 그가 1년 동안 준비해서 차세대들이 한인사회 모범 인물들을 발굴하게 도움을 주고 차세대 스스로 배우고 정체성 확립을 할 수 있는 발판을 마련해 주고 있다.   필자는 그동안 한인사회 차세대 교육에 관심을 갖고 미주한인사 교육의 중요성을 강조해 왔는데 앞으로도 아마 차세대 교육 프로젝트에 관심을 갖고 참여할듯하다. 영웅과 전설 프로젝트가 로스앤젤레스에서 시작되어 자리를 잡아가고 있으니 타 도시에도 확산하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미주한인사 교육도 서서히 타지역으로 확산하고 있는 시점에 영웅과 전설 프로젝트와 접점을 찾는다면 효율적인 차세대 교육 방법이 될 수도 있을 것이다.   영웅과 전설 북 사인회는 한인사회의 모범으로 선정된 인물들과 가족 그리고 차세대 청소년들 3세대가 함께 참석하여 서로 알아가는 자리가 되었다. 이런 뜻 깊은 만남의 시간을 통해 희망을 이야기하면서 한인 사회의 밝은 미래 모습을 보게 되었다. 장태한 / UC 리버사이드 교수·김영옥 재미동포연구소장중앙시론 프로젝트 영웅과 한인사회 모범인물 영웅과 전설 전설 프로젝트

2025-02-04

[이아침에] 달팽이 뿔 위에서 싸우지말고

“부--자 되세요.” “대박 나세요.”   이런 직설적인 덕담은 우리 어릴 땐 들어보지 못했다. 오히려 물질을 내놓고 말하면 품위 없는 사람으로 치부되었다. 이러한 말을 이 삼십 년 전에 했더라면, 주변사람들로부터 받았을 경멸의 시선을 요즈음 젊은이들은 짐작하지 못할 것이다. 돈이 그때나 지금이나 삶에 있어서 중요하지 않은 것은 아니었어도 보통은 그렇게 입에 올려가며 드러내어 말하지 않았다.   돈이 인격이자 지위이자 그 사람을 나타내는 가장 큰 척도가 되는 요즈음, 그걸 보고 “천박해!” 하고 평가할 용기는 아마 없을 듯하다. 연말연시에 주고받은 인사대로 라면 새해에 돈은 엄청 벌게 되어있고 평생 한 번이나 날까 말까 한 대박도 여러 번 나게 되어있다. 하지만 올해의 돈이 덕담처럼 다 내게로 몰려올 것인가? 언감생심이다.   행복지수라는 것이 있다. 자기가 바라는 것을 분모로 삼고 성취한 것을 분자로 삼으면 행복지수가 된다. 행복지수를 높이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사람들은 보통 성취한 것을 늘리는 방법을 생각하지만 ‘바라는 것’을 줄이는 것도 행복을 키우는 다른 하나의 좋은 방법이 될 것이다.   2024년에 발표된 유엔의 행복보고서에 따르면, 143국 중 1위는 7년째 가장 행복한 나라에 선정된 핀란드, 부자나라인 미국의 행복지수는 23위, 대한민국은 52위였다. 결국 경제적으로 잘 산다고 꼭 행복하게 느끼는 것은 아니라는 말이다.   미국에 살면서도 한국에 관심이 많이 간다. 결과나 수치를 볼 때도 미국과 한국이 동시에 마음이 쓰이곤 한다. 일가친척이 많이 살고 있는 내 조국이 아닌가. 한국이 안정되고 잘 살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1월 한 달은 매우 복잡했다. 살고 있는 이곳은 하늘의 재난으로 지옥 같고 저곳은 사람이 만든 지옥 같아서 두 지옥 사이에서 갈피를 잡기 어려웠다.   당나라의 시인 백거이(白居易)가 술을 마주하고 지은 시 ‘와각지쟁(蝸角之爭)’은 다음과 같다. ‘蝸牛角上爭何事(와우각상쟁하사)/石火光中寄此身(석화광중기차신)/隨富隨貧且歡樂(수부수빈 차환락)/不開口笑是癡人(불개구소시치인)’   우리말로 옮기면 이런 뜻이다. ‘달팽이 뿔 위에서 무엇을 다투는가?/ 부싯돌 번쩍하는 찰나에 의탁한 이 몸/ 부유한 대로 가난한 대로 즐거움 있는 법/ 입을 벌려 웃지 않는 이 어리석은 자로다.’   우리 속담에 소문만복래(笑門萬福來)라는 말이 있다. ‘웃는 집안에 복이 많이 들어온다’는 뜻이다. 이는 기업이나 국가에도 해당한다. 지도자들뿐만 아니라 일반 국민이 자주 웃을 수 있어야 국운도 상승이 될 것이다. 조그만 나라 대한민국에서 좌우가 갈려 싸우는 건 달팽이 두 뿔 위에서의 싸움과 무엇이 다를까.   ‘와각지쟁’을 멈추고, 얼굴마다 웃음 넘치는 날들이 활짝 열렸으면 좋겠다. 이정아 / 수필가이아침에 달팽이 나라 대한민국 지옥 사이 분모로 삼고

2025-02-04

[기자의 눈] 트럼프 관세 폭탄, 한국의 협상카드는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이 캐나다와 멕시코를 상대로 보편 관세 25%를 선포했다가 한 달간 유예했다. 이에 캐나다는 ‘펜타닐 차르’를 임명하고 마약 밀매 조직을 테러리스트로 지정했으며, 국경 감시를 24시간 강화하기로 했다. 멕시코 역시 불법 이민자 및 마약 유입을 막기 위해 1만여 명의 군 병력을 미-멕시코 국경에 배치했다.   이제 시선은 한국으로 향한다. 트럼프 대통령이 한국에 어떤 방식으로 높은 관세를 부과할지는 아직 불확실하지만, 한국도 캐나다와 멕시코처럼 강력한 협상 카드를 준비해야 한다. 미국이 필요로 하는 ‘강력한 한 방’을 제시하지 않는다면, 한국은 트럼프 대통령의 관세 폭탄을 고스란히 맞을 위험이 크다.   첫 번째로 한국이 고려할 수 있는 한 방은 조선업이다. 이미 여러 차례 언급된 바 있지만, 미국 해군의 향후 계획을 봤을 때 생각 이상으로 강력한 한 방이 될 수 있다.   미국 해군은 니미츠급 항공모함 USS 니미츠호를 비롯해 현재 운용 중인 타이콘데로가급 순양함과 오하이오급 원자력 잠수함 대부분 등 주력 군함을 대거 퇴역시킬 예정이다. 이를 보완하기 위해 향후 30년간 전투함 293척, 군수 및 지원함 71척 등 총 364척의 새 군함을 구매하고, 1조750억 달러를 투입해 항공모함과 잠수함 59척을 신규 건조할 계획이다.   그러나 미국 조선업은 이러한 대규모 계획을 감당하기에 한계가 있다. 현재 미국 해군의 함정은 미국 내 7개 조선소에서만 건조되며, 생산성이 낮고 비용이 높다. 반면, 한국은 세계적인 군함 건조 기술을 보유하고 있으며, 높은 효율성과 빠른 건조 속도를 자랑한다.   예를 들어, 한국에서 이지스 구축함 1척을 건조하는 데 약 8억 달러와 18개월이 소요된다. 반면, 미국에서는 동일한 함정을 건조하는 데 28개월이 걸리고 비용도 16억 달러로 두 배가량 많다.   미국 해군의 제해권과 패권 유지를 위해서는 한국 조선업의 협력이 필수적이다. 신규 함정 건조를 비롯해 MRO(유지·보수·운영) 사업까지 미국 해군의 운용 능력 증강을 위해서는 한국 조선업의 손길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트럼프 대통령도 인지하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조선업은 트럼프 대통령과의 관세 협상에서 유용한 카드가 될 수 있다.   한국이 고려해볼 만한 또 다른 한 방은 방위산업 협력이다. 트럼프 대통령은 동맹국이 더 많은 국방비를 부담하길 원하며, 한국과 일본의 군사적 협력을 통해 중국을 견제하려 한다. 한국은 이를 수동적으로 받아들이기보다, 적극적인 협력 방안을 제시해야 한다.   단순히 주한미군 방위비 분담금 인상을 두고 끌려다니는 것이 아니라, 국방력을 강화하는 방향으로 나아가는 것이 더 나은 전략이다. 미국과의 방산 기술 협력을 확대하는 것이 그 방법이 될 수 있다.   양국은 미사일 방어 체계 강화와 우주력 증강이라는 공동 목표가 있다. 트럼프 대통령은 통합 미사일 방어 시스템 구축을 추진 중이며, 한국도 킬체인, 한국형미사일방어(KAMD), 대량응징보복(KMPR)으로 구성된 3축 체계를 고도화하고 있다. 또한, 트럼프 대통령은 지난 1기 정부에서 미국 우주군을 창설하고 최근에는 우주군 공격력 강화 계획을 세운 바 있으며, 한국도 한국형 NASA인 우주항공청 설립을 통해 항공우주 기술 발전을 도모하고 있다.   한국이 미사일 방어 체계 및 우주 방위산업에 대한 투자 확대를 제안한다면, 트럼프 대통령도 긍정적으로 반응할 가능성이 크다. 무엇보다, 한국이 먼저 협력 방안을 제시한다면 관세 인상보다 더 유리한 결과를 얻어낼 수도 있다.   트럼프 대통령은 협상에서 상대의 요구를 정확히 파악한 뒤, 이를 지렛대 삼아 원하는 결과를 끌어낸다. 한국은 그의 관세 압박에 속수무책으로 당하기 전에 강력한 한 방을 준비해 그의 장단에 맞춰주는 동시에 실익을 추구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한국 경제는 또 한 번 미국발(發) 충격에 휘청거릴 수밖에 없을 것이다. 김경준 / 사회부 기자기자의 눈 협상카드 트럼프 트럼프 대통령 한국 조선업 도널드 트럼프

2025-02-04

손원임의 마주보기 - 노화와 우아한 삶(하)

사람들이 은퇴하면서 하는 말 중에 가장 많이 듣는 말이 있다. 바로 “나는 이제 내 인생의 제 2막을 아주 멋지게 살 거야!”라는 것이다. 하지만 은퇴 후 몸과 마음과 정신이 예전과 같지 않음을 알고는 잔뜩 부푼 기대로 세웠던 계획들을 수정 또는 포기하고 실망과 좌절감에 휩싸이기도 한다.     나 역시 교수로서의 바쁜 삶으로부터 은퇴한 후, 배가 나오고, 열정은 많이 식었으며, 건망증은 물론이고, 가끔은 뇌에 낀 안개, 즉 ‘brain fog’로 정신이 멍한 느낌이다. 그래서 내린 결론이 있다면, 앞으로의 내 인생 2막의 목표를 “우아한 삶에 두자”는 것이다.     나는 ‘우아한 삶’의 첫번째 법칙으로 건강한 몸 관리를 강조했다. 그러면 두 번째는 무엇일까? 그것은 정신의 줄을 놓지 않는 것이다. 그래서 ‘인지적 소양’을 꾸준히 키워야 한다. 정신의 건강은 신체의 건강과 아주 깊이 연관되어 있기 때문에, 몸을 자주 움직이고 사지를 잘 사용하는 것 역시 매우 중요하다.     이는 뇌의 건강과도 밀접한 관련이 있다. 특히 손의 사용은 뇌의 발달을 자극하고, 우리 뇌의 연결 회로를 지하 속으로 흐르는 매우 굵은 케이블처럼 더욱 단단하게 강화해 준다. 왜냐하면 우리가 양손을 쓰는 활동들을 통해서 계속해서 우리의 좌뇌와 우뇌 둘 다를 지속적으로 활성화하기 때문이다.     다만 늙어가면서 손목이 아파오고, 손의 근력이 떨어짐을 고려해서 자신에게 맞는 재미와 취미를 찾아보자. 이에는 가벼운 운동은 당연하고, 뜨개질, 정원 가꾸기, 그림 그리기, 일기 쓰기, 집안 청소 등을 들겠다. 젓가락질이나 글쓰기를 오른손과 왼손을 번갈아가며 가끔씩 해보는 것도 괜찮다.     최근 지미 카터(Jimmy Carter, 1924~2024), 미국의 제 39대 대통령이 별세했다. 카터는 100세를 일기로 정말 장수했다. 그는 인생의 2막에 인권의 증진과 비영리 주택 기구를 위해서 일했고, 노벨 평화상을 수상했다. 특히 나는 그가 사랑하는 아내와 함께 무주택 저소득 가정을 위한 사랑의 집을 짓기 위해서 노년의 나이에도 불구하고 직접 망치를 들고 손과 머리와 몸을 썼다는 데에 매우 감동했다.     이처럼 노년에도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을 찾아서 조금씩 실천하면 되는 것이다. 물론 여기서 우리는 지미 카터가 현대의학의 ‘면역요법’의 상당한 진전과 성과로 인해서 2015년에 전이성 흑색종을 치료했으며, 다행히 목숨을 구할 수 있었다는 사실도 잊어서는 안 된다.   세번째는 ‘자중’이다. 사람은 늙으면서 자중하는 삶을 살아야 아름답다. 자중은 자아를 소중히 여기고, 매사에 언행과 행동을 신중하게 하며, 남에게 관용을 베푸는 것이다. 즉 자신의 행복을 추구하되, 남에게 피해를 주지 않도록 해야 한다. 사람들은 때로 자아를 지키는 것에는 능해도 상대방의 인격 존중에는 신경을 덜 쓴다. 이것이 모든 문제의 ‘씨앗’이다. 따라서 가족 내에서뿐만 아니라 모든 인간관계 속에서 상대방에 대한 비난과 잔소리를 삼가야 한다.     나는 모든 인격 존중의 시작은 ‘자성’에서 비롯된다고 믿는다. 우리가 우리 자신을 알고 우리 마음 속을 다스릴 수 있으면, 타인을 쉽게 비난하지 않는다. 그리고 더 나아가 유머와 융통성으로 우아함을 화려하게 꽃피우게 된다. 우아는 여유와 포용력에서 ‘빵빵 팡팡!’ 풍기는 법이다.     지금까지 겸손한 마음으로 노화를 ‘우아하게 늙어가기’에 비유했다. 그리고 이 우아한 삶의 방법에 대해서 아주 간략하게 세 가지로 정리해 보았다. 즉, 건강한 몸 관리, 지적 소양 쌓기, 자중으로 말이다. 물론 사람마다 노화의 의미를 달리 가져갈 수 있지만, 이런 몇 가지만 실천해도 우아한 삶의 기틀을 든든하게 다잡아 갈 수 있다.     그리고 이들 실천 방안은 바로 교육에서 항상 강조되고 반복되는 ‘지덕체’로 귀결된다. 이는 인간의 심신의 건강은 ‘신비롭고 매우 복잡한 미로’처럼 아주 밀접한 관련이 있기에 충분히 이해되는 점이다. 이렇게 말하고 싶다. “삶이 그대를 속이고 까맣게 엄습해오더라도, 세월과 함께 몸과 마음이 지쳐서 힘들고 슬퍼지더라도, 우리 스스로 뱃심, 멋, 긍정적 자세, 지혜로 대처하도록 노력해야 한다.” 우리 모두 조금 더 용기 있게, 조금 더 여유롭게, 조금 더 우아하게 늙어가자. (전 위스콘신대 교육학과 교수, 교육학 박사)  손원임손원 노화 교수 교육학 위스콘신대 교육학 지미 카터

2025-02-04

이기희의 같은 하늘 다른 세상 - 우연이 필연이 되기까지

어젯밤 꿈 속에 너를 만났다. 너는 왼편 윗쪽에 나는 아랫쪽에 있었다. 우리들 사이에는 닿지 못할 공간이 있었다. 밝지도 어둡지도 않는 모호한 간극이 이승과 저승처럼 우리를 갈라 놓는다. 얼굴이나 모습은 떠오르지 않는다. 실루엣으로 서있는 뒷모습 보며 네 이름이 생각났다. 가슴이 널 기억하고 있으니까.   꿈 속에서도 나는 꿈꾼다. 그리운 사람들의 얼굴을 꿈 속에서 찿아 헤맨다. 소슬바람에 흩날리는 가랑잎처럼 뒹굴다가 어느날 우연히 동무가 됐다. 여태 우정이 무엇인지 나는 잘 알지 못한다. 누구에게 매달려서 정신적인 유대감을 갖거나 외로움 그리움 괴로움 쓸쓸함 같은 단어들로 위로를 받기에는 사는 것이 너무 각박했다.   이국 땅에서 아이 셋 키우며 사업하고 화랑과 창작예술센터를 운영하며 차별 받지 않기 위해 이를 악다물고 버티며 살았다. 사업이나 행사로 한국을 가도 동창이나 친구들에게 연락할 겨를이 없었다. 이국 땅에서 홀로서기는 땅따먹기 할 때 한 발로 뛸 때처럼 고달프고 힘들었다.   친구는 명석하고 너그럽고 이해심 많고 다정했다. 일년 내내 전화 한통 안 하다가 도착하기 일주일 전에 알려주면 젊은 느티나무처럼 날 기다리며 그 자리에 있었다. 무얼하며 어떻게 살았는지 묻지 않는다. ‘배 고프지. 먹으러 가자’며 소문난 냉면집이나 갈치백반 식당으로 데려가 주린 배를 채워준다.   뇌졸중으로 쓰러진 너를 마지막 본 지도 유수 같은 세월이 흘렀다. 지친 나의 이국생활을 보듬어 주며 도착부터 출국까지 스케줄을 꿰고 있던 네가 없는 내 나라는 이국처럼 낯설다. 이제 한국을 가면 끈 떨어진 연처럼 나는 펄럭인다.   너는 나보다 나를 더 잘 안다. 반 평생 넘는 이국 생활에도 자음과 모음을 떨쳐내지 못하고 사무치도록 집착하는 나에게 ‘꼭 할 수 있다’며 용기와 희망을 주던 친구여. 너의 격려와 믿음이 없었다면 자전소설 두권과 자전에세이 ‘여왕이 아니면 집시처럼’을 출간할 엄두도 못냈을 것이다.   인간이 죽는다는 현상은 필연이다. 언제 어느 곳에서 사고(事故)로 죽는 것은 우연이다. E.T.처럼 필연이 우연을 통해서 나타나 필연이 되기도 한다.   어느 한적한 마을 숲속에 우주선이 나타난다. 우주선에서 내린 외계인들은 지구의 각종 표본들을 채취하는데 인간들이 나타나자 서둘러 지구를 떠나고 뒤쳐진 한 외계인만 남게 되고 꼬마 엘리어트를 만난다. 엘리어트는 외계인에게 E.T.(Extra-Terrestrial)란 이름을 붙여주고 형 마이클과 여동생 거티와 끈끈한 정을 나눈다. 그러나 E.T.는 자신의 별로 돌아가야할 몸. 우여곡절 끝에 E.T.는 아이들의 배웅을 받으며 “항상 네 곁에 있을께”란 약속을 남긴 채 지구를 떠난다.   그리운 친구여. 다시 만날 수 없는 작별이여. 우리의 만남은 우연에서 출발했지만 필연으로 남아있다. 별에서 혹은 달에서, 유성처럼 떠돌던 두 물체가 지구에서 만나게 되듯이 필연은 항상 우연을 동반한다.   인생은 우연히 태어나서 필연적으로 죽는다. 아인슈타인은 ‘우연은 신이 익명을 유지하는 방법이다.’라고 했다.   죽음이 우리를 갈라 놓는다 해도, 달과 별이 빛나는 밤에는, 가슴에 손을 얹고 사랑을 꿈꾼다. 찰나의 만남이라 해도 그 곳에 우리가 있었기에 행복했다.  (Q7 Editions 대표, 작가)   이기희이기희 하늘 이국 생활 꼬마 엘리어트 외로움 그리움

2025-02-04

[사설] 윤 대통령, 국군통수권자답게 계엄 진상 밝혀야

━ 내란 혐의 부인에도 고위 관련자 증언 쌓여 ━ 법 기술자적 전략 대신 진실 규명 협조해야 윤석열 대통령이 어제 헌법재판소에 세 번째로 출석했다. 앞선 두 번의 기일(3, 4차 변론)과 달리 이날 재판(5차 변론)엔 윤 대통령 측 주장과 배치되는 진술을 했던 전직 장성과 고위 공직자 세 명이 증인으로 나왔다. 12·3 계엄 당시의 사실관계가 더 구체적으로 드러날 것으로 기대를 모았으나 국민의 답답함은 여전히 해소되지 않고 있다. 윤 대통령 공소장에 나온 관련자 진술과 기존 증언 등이 내란 우두머리 혐의를 향하고 있음에도 새로운 반박 논리가 추가되는 양상이 이어지고 있다. 엇갈리는 사실관계를 정리해 줄 것으로 기대됐던 이진우 전 수방사령관과 여인형 전 방첩사령관은 자신의 형사사건과 관련돼 있다는 이유로 검찰 진술과 관련한 증언은 하지 않았다. 눈을 감은 채 증언을 듣던 윤 대통령은 문형배 헌법재판소장 권한대행이 발언 기회를 주자 “실제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았는데 (체포) 지시를 했니, 받았니 이런 얘기들이 마치 호수 위에 떠 있는 달그림자 같은 걸 쫓아가는 느낌”이라고 말했다. 지난달 21일 “계엄 해제 결의를 위해 국회에 모인 국회의원들을 끌어내라고 지시한 적이 있으십니까?”라는 질문을 받고 “없습니다”라고 답변한 것처럼 자신의 혐의와 관련 진술을 모두 부인한 것이다. 실체적 진실을 가리는 사법적 판단에 시간이 더 필요해 보이는 상황이지만, 계엄 당시의 사실관계에 대한 상식적 근거는 쌓여 가고 있다. 지난 3일 공개된 공소장엔 윤 대통령이 이진우 전 사령관에게 “본회의장으로 가서 4명이 1명씩 둘러업고 나오라고 해” 등의 지시를 했다는 공소사실이 적시됐다. 홍장원 전 국정원 1차장은 윤 대통령이 “이번에 다 잡아들여서 싹 다 정리하라”고 했다는 기존 주장을 재확인했다. 어제 국회 국정조사에서 곽종근 전 특전사령관은 김용현 전 국방부 장관이 “국회의원이 아니라 요원을 끌어내라고 한 것”이라고 한 것에 대해 “요원을 빼내라고 했던 그때 당시의 시점에선 그 인원들이 본관에 들어가 있지도 않았다”고 정면 반박했다. 윤 대통령이 “다치는 사람이 없도록 철수하라”고 했다는 점에 대해서도 “지시받은 바 없다”고 했다. 윤 대통령 측은 공소장에 적시된 통화 횟수가 다른 공소장과 차이가 있는 점 등을 지적하기도 했다. 공소사실의 흠결은 지적해야겠지만, 내란 중요임무 종사 혐의로 구속된 부하들과 윤 대통령의 주장이 첨예하게 대립한 마당에 민망한 변론이 아닐 수 없다. 사태의 본질을 가리키는 고위 장성과 공직자들의 증언이 넘쳐나고 있다. 그들이 윤 대통령의 신임을 받았던 이 정부의 엘리트라는 점에서 진술의 신빙성이 낮다고도 할 수 없다. 윤 대통령 측은 앞으로 진행될 헌재와 법원의 재판에서 법 기술자의 강변보다는 국군통수권자로서의 진정성을 보여줘야 한다.

2025-02-04

[사설] 중국은 AI 굴기, 한국은 AI 인재 유출에 의대 광풍까지

━ 첨단 인력 비자 받고 국내 체류하는 전문가 38명뿐 ━ 보상 시스템 바꾸고 혁신 친화적으로 제도 고쳐야 중국 스타트업 딥시크의 인공지능(AI) 모델 공개 이후 중국의 강점과 턱없이 부족한 우리의 실정을 대비시킨 국내 언론의 후속 보도들이 이어졌다. 본지의 ‘딥시크 쇼크’ 시리즈는 중국의 AI 굴기(崛起)가 10년 전인 2014년 중국 정부 주도의 혁신창업 진흥정책에서 시작됐다고 짚었다. 딥시크는 4700개 이상인 중국 AI 기업의 하나일 뿐이며, 현지에서 더 주목받고 실력 있는 기업이 많다는 국내외 전문가들의 증언은 두려울 정도다. 더 심각한 것은 인재 수급 문제다. 미국 시카고대 싱크탱크의 ‘글로벌 AI 인재 추적’에 따르면 2022년 상위 20%인 최고 수준 AI 연구자의 47%가 중국 출신이다. 2위 미국(18%)과 격차가 크다. 활동지 기준으로도 중국(28%)이 미국(42%) 못지않다. 이젠 중국도 젊은 AI 인재가 마음껏 뛰노는 대운동장이 됐다. 반면, 한국은 출신이나 활동지 기준 모두 2% 이하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는 한국을 AI 인재 유출국으로 분류한다. 한국은 우버가 서비스를 접은 몇 안 되는 나라이고 토종 모빌리티 혁신기업인 타다마저 문을 닫게 할 정도로 혁신기업에 가혹하다. AI·반도체·항공 등의 해외 기술인재를 유치하기 위해 법무부가 2023년 도입한 ‘첨단 전문인력비자(E-7-S)’로 국내에 체류 중인 전문가가 38명뿐이라는 본지 취재 결과는 할 말을 잃게 한다. 우리 인재는 해외로 떠나보내고 해외 인재는 연구 자율성과 인프라가 부족한 한국을 외면하는 실정이다. 국내 수급만 떼어놓고 봐도 답답하긴 마찬가지다. 중국은 해외 유학 경험이 없는 순수 국내파가 AI 굴기의 주역이다. 매년 공학 엔지니어 150만 명이 배출된다. 딥시크 창업자 량원펑의 고향인 중국 남부 광저우의 농촌 마을을 찾는 관광객들은 “공부가 운명을 바꾼다”며 이공계 기술 천재를 꿈꾼다. “중국 영재의 절반은 칭화대에 있고, 칭화대 영재의 절반은 AI·양자정보·컴퓨터공학의 브레인 양성소인 야오반(姚班)에 있다”는 중국 현지의 자부심도 부럽다. 하지만 한국은 빗나간 의대 열풍 탓에 이공계 학과는 정원 채우기조차 힘든 지경이다. 어제 카카오가 오픈AI와 동맹을 맺고, 이재용 삼성전자 회장과 손정의 소프트뱅크그룹 회장, 샘 올트먼 오픈AI 최고경영자(CEO)가 AI 3자 협력을 논의했다. 글로벌 AI 강자와 국내 대기업의 협력도 의미 있지만 더 중요한 것은 AI 생태계를 탄탄하게 꾸리는 것이다. 이를 위해선 인재 양성부터 최우선으로 고민해야 한다. 이공계 인재가 우대받고 존경받는 방향으로 우리 사회의 인센티브 시스템을 근본적으로 뜯어고치고 제도와 인프라를 혁신 친화적으로 고치지 않으면 정부가 내세운 AI 3대 강국의 꿈은 현실이 되기 힘들다.

2025-02-04

[정운찬 칼럼] 무너진 원칙과 공정을 되살리자

12·3 계엄 선포로 우리 사회에 먹구름이 두 달 넘게 짙게 깔려있다. ‘G8 국가’를 꿈꾸는 경제 강국에 걸맞은 국제적 위상은 찾아볼 수 없게 됐다. 국민들 얼굴에는 이미 체감하고 있는 불황과 나라 안팎의 불확실성에 수심이 가득하다. 검찰총장 출신인 윤석열 대통령은 계엄선포 절차도 제대로 지키지 않았다. 마침내 지난 1월 19일 내란과 직권남용 등의 혐의로 구속됐다. 비상계엄부터 구속까지 47일 동안 우리 국민은 사상 ‘초유’의 사태를 여러 번 목격해야 했다. 이 난국을 수습하는 과정에서 공수처와 사법기관마저 공정과 상식이 결여된 언행으로 국민들의 불신을 자초하고 있다. ‘G8 국가’ 꿈에 충격 준 계엄 사태 수사·탄핵심판도 절차 흠결 논란 국민 시선은 야당 대표 재판으로 헌법과 권력구조 전면 개편 필요 공수처는 수사 권한도 없는 내란혐의에 대해 현 대통령을 수사하면서 위법과 무능을 드러냈다. ‘영장 쇼핑’ 논란을 벌인 서울서부지법에서의 새벽 난동으로 수십명의 청년들이 구속된 사태는 우리 사회가 갈수록 극단으로 치닫고 있는 징후로 크게 우려된다. 헌법의 최후 보루인 헌법재판소는 어떤가? 탄핵 절차는 완벽하게 합법적이어야 하고, 피청구인인 대통령에게 충분한 방어권을 보장해야 한다. 윤 대통령이 계엄선포에서 헌법을 지키지 않은 채 절차를 위반한 것과 같이 헌재가 절차상 흠결을 드러낸다면 이 나라 법치주의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 것과 다름없다. 헌재가 탄핵소추사유에서 내란죄 항목을 빼라고 조언했다는 탄핵청구인 변호사의 주장이 사실이라면 경악하고 분노할 일이다. 그것은 지금 헌재가 국민들의 높은 관심과 함께 불신도 받고 있다는 증좌다. 또한 일각에선 탄핵 반대 여론이 40% 이상인 상황에서 헌재가 서둘러 판결하려는 것에 “무슨 저의가 있는 것 아니냐”는 의구심을 갖고 있다. 법원에 대한 불신과 불만이 깊어가는 것도 우려된다. 윤석열 대통령의 구속영장을 발부한 서부지법의 법 적용과 2023년 9월 이재명 대표의 영장 기각을 비교해 보자. 그때 판사는 영장기각 사유를 “피의자의 방어권 보장 필요성 정도와 증거 인멸 염려 정도 등을 종합하면 불구속 수사의 원칙을 배제할 정도로 구속의 사유와 필요성이 있다고 보기는 어렵다”며 “정당의 현직 대표로서 공적 감시와 비판의 대상인 점을 감안했다”고 상세히 밝혔다. 그런데 이번엔 단 15자, “피의자가 증거를 인멸할 염려가 있음”뿐이었다. 헌재 탄핵 심판에 막대한 영향을 줄 수 있는 현직 대통령의 구속영장을 발부하며 판사는 증거 인멸, 도주 우려, 범죄 소명 여부를 설명하지 않았다. 국회 체포동의안까지 통과됐던 이재명 대표의 구속영장 기각과 형평성이 단번에 드러난다. 법치란 사회공동체가 구성원의 일탈 행위를 원칙과 공정을 기반으로 보편적이고 논리적 방법으로 풀어가는 과정이다. 그리고 법원은 국가가 공인한 보편적이고 논리적인 권력이어야 한다. 헌재 판결이 인용이 되든 기각이 되든 절차상 정당성이 결여되고 원칙과 공정에 부합하지 않는 결과가 나온다면 헌재 판사들도 역사의 심판을 피할 수 없을 것이다. 이제 국민의 시선은 이재명 대표의 선거법과 위증교사, 대장동, 대북 송금 사건 등을 다루는 법원으로 쏠려 있다. 이미 국가의 얼굴인 대통령의 위상과 품격은 바닥에 떨어졌고, 국민 대표기관인 국회의 권위도 오래전부터 추락했다. 공수처는 물론 원칙과 공정에서 벗어난 헌재와 법원도 점점 품격이 떨어지고 있다. 이 대표 재판 지연으로 논란 속에 대선을 치른다면 사법부는 감당 못 할 상황을 겪을 수 있다. 수년을 끌어온 야당 대표의 사법처리와 계엄사태로 야기된 혼란을 원칙과 공정을 기반으로 빠른 시일 안에 정리해야 한다. 윤 대통령은 비상계엄을 선포한 까닭과 과정을 소상히 밝히는 한편, 부하들에게 책임을 돌리는 모습은 결코 보여선 안 된다. 자신에 대한 지지율이 오른다고 해서 계엄 선포로 입은 엄청난 국격 추락과 막대한 국익 손상에 대한 귀책은 결코 면제될 수 없다. 공수처를 비롯한 검경 수사기관은 정치적 중립성을 의심받을 처신을 삼가고, 오직 증거와 법리에 근거한 수사를 해야 한다. 사법기관은 공명정대한 절차와 판결을 통해 우리 사회를 떠받치는 ‘정의 지킴이’ 역할을 묵묵히 수행함으로써 국민의 신뢰를 회복해야 한다. 비상계엄의 사유와 절차를 무시한 현직 대통령의 탄핵소추와 구속은 개인의 법적 책임을 넘어 한국 정치 시스템의 근본적 모순을 다시 한번 환기했다. 더 늦기 전에 1987년 헌법 체계에 대한 재검토와 권력구조 개편을 위해 여야가 머리를 맞대야 할 때다. 어떤 이들은 탄핵이 기각되면 몰라도 인용된다면 선거부터 치른 후 개헌을 하자고 말한다. 아니다. ‘선 개헌, 후 선거’가 답이다. 또는 개헌과 선거를 동시에 하도록 하자. 아울러 여야 정치권 모두 경제와 외교에는 한목소리를 내야 한다. 이번 위기를 어떻게 극복하느냐에 대한민국의 국격 회복과 국운이 달려있다. 정운찬 동반성장연구소 이사장·전 서울대 총장

2025-02-04

[안혜리의 시시각각] 이스라엘이 딱 지금 우리 같았다

이스라엘이 딱 지금 우리 같았다. 텔아비브에서만 20만, 전국적으론 무려 50만에 달하는 역사상 최대 규모 시위대가 거리로 쏟아져 네타냐후 정부의 사법개혁(실은 사법부의 행정부 견제 기능을 무력화하려는 시도)에 반대하는 시위(2023년 3월 11일)를 벌이면, 이에 질세라 사법개혁에 찬성하는 20만 시위대가 예루살렘 크네세트(의회) 앞으로 몰려가 네타냐후 지지 시위(2023년 7월)를 벌였다. 하루 이틀 그러다 만 게 아니다. 네타냐후가 사법부 무력화에 나선 2023년 초부터 9개월 내내 양 진영이 이런 극심한 대립을 이어가다, 그해 10월 하마스에 침공당해 인질 250여 명이 끌려가고 나서야 비로소 시위를 멈췄다. 사법부 둘러싼 극한 사회 분열 안보 위협 대비 대신 정쟁 매몰 "갈등 속 약한 순간 공격 당한다" 솔직히 그땐 이스라엘 국내 정치에 큰 관심은 없었다. 다만 뉴욕타임스(NYT)에 하루가 멀다고 "대규모 시위가 야기한 정치적 불확실성 탓에 유력 기업과 인재, 돈이 죄다 해외로 빠져나가 첨단기술 산업이 큰 타격을 입고 있다"는 식의 경고성 기사와 인터뷰가 실리는 걸 보고 향후 이스라엘 경제가 살짝 궁금했을 뿐이다. 실제로 그해 상반기에만 투자 유치 금액이 70%나 감소했다. 돌이켜보니, 약과였다. 경제 뒷걸음질이나 성장 동력 약화 정도가 아니라 수천 명의 인명 피해를 낳은 전쟁으로 귀결돼 신용등급이 두 단계나 하향(무디스 A2→Baa1)됐으니 말이다. 요즘 자꾸만 그때의 이스라엘이 떠올라 불길하다. 하마스 침공 직전까지 사법부를 둘러싼 극심한 정치적 대립이 이스라엘 사회를 양분했고, 이렇게 "이스라엘이 가장 약해진 순간 하마스가 공격했다"는 NYT 칼럼니스트 토머스 프리드먼의 비판을 우리 정치 상황에 그대로 적용할 수 있어서다. 이스라엘 역사학자 유발 하라리가 "국내 정치에 매몰돼 외부 위협 관련 군사·정보기관 경고를 무시했다"고 주장한 것처럼, 상존하는 하마스의 위협에도 불구하고 이스라엘 정부는 반대파를 찍어내기 위한 내부 정쟁에만 몰두했다. 북한 위협에서 한시도 벗어난 적 없는 지금 한국 역시 마찬가지다. 윤석열 대통령의 계엄 발동과 탄핵 국면 와중에 여당인 국민의힘과 거대 야당인 더불어민주당으로 대변되는 양 진영은 미국·중국에 뒤진 우리 AI 역량이나 국제 정세는 나 몰라라 하고 대권 쟁취를 위한 정치적 유불리만 계산한다. 헌법재판소의 공정성과 이념적 성향을 둘러싼 극한 대립은 계엄으로 이미 막대한 손실을 본 우리 경제에 더한 타격을 주고 국가 안보 역량까지 갉아먹을 게 분명하다. 취임하자마자 관세 장벽을 쌓고 북한과 직거래하려는 트럼프 정부로부터는 이미 소외당하고 있지 않나. 다시 이스라엘로 돌아와, 양측 모두 명분은 있었다. 사법개혁 반대파 주장처럼, 뇌물수수와 사기 혐의로 재판받던 네타냐후 총리가 본인의 법적 문제 해결을 위해 사법개혁을 들고나온 측면이 있다. 동시에 "소수의 대법원 판사가 사법 체계를 쥐락펴락하는 걸 고치는 게 민주주의 회복"이라는 찬성파 주장에 동조하는 사람도 적지 않았다. 네타냐후가 사법부를 손보기 전부터 대법원 신뢰도(41%, 2021년 설문)가 그리 높지 않았기 때문이다. 네타냐후 측은 이런 선량한 국민의 불만을 포착해 개인 비리로 재판받는 본인은 '박해받는 사람', 사법부는 '선출 권력을 방해해 국민 의지를 무시하는 비민주적 세력'이라고 낙인찍었다. 그의 지지자들이 "투표에서 못 이기니 법정을 통해 권력을 장악하려 한다"고 동조한 걸 보면 이런 선악 구도 프레임짜기는 정치적으로 성공한 셈이다. 아내 문제 등 여러 정치적 위기에 몰린 상황에서 계엄을 선포한 윤 대통령이 "좌파 사법 카르텔" 운운하며 헌재와 대법원의 일부 편향된 판결에 불만을 품어온 보수층 지지를 끌어내고 있는 것과 유사하다. 문제는 영향력 있는 여야 최고 권력의 정치인들이 사회 전반의 신뢰를 무너뜨리는 분열의 씨앗을 뿌려 사회적 갈등이 극에 달하면 전쟁이라는 국가적 재앙을 맞을 수 있다는 점이다. 이스라엘이 그걸 보여줬다. 그렇다면 진영을 떠나 우리 국민이 해야 할 선택은 명확하지 않을까. 안혜리(ahn.hai-ri@joongang.co.kr)

2025-02-04

"지금 개헌 안하면 다음 대통령도 똑같은 일 당할 것" [강찬호의 뉴스메이커]

서울대 국가미래전략원 강원택 신임 원장 - 한국 정치 30년간 연구해온 권위자의 개헌론 서울대의 핵심 싱크탱크인 국가미래전략원(전략원)이 ‘개헌’에 발 벗고 나섰다. 30여년간 한국정치를 연구해온 강원택 정치외교학부 교수가 새 원장에 취임하면서 최우선 과제로 개헌을 택한 것이다. “20년 전부터 개헌을 주장해왔지만 지금처럼 개헌 필요성이 절박하고 가능성도 커진 적이 없다”는 그는 “이번에도 개헌 없이 넘어가면 다음 대통령도 ‘윤석열의 비극’을 피할 길 없을 것”이라고 했다. “‘87년 체제’는 완벽히 종언을 고했다. 제왕적 대통령제 대신 책임총리제로 개헌해야 한다”는 강 원장을 만났다. ‘87년 체제’ 파산 뚜렷, 책임총리제로 개헌 필수 지금 체제로 집권? 국정마비·탄핵 재연 불보듯 이재명, 개헌 앞장서야 국민이 리더십 다시 볼 것 민주당도 친명 외엔 개헌 동조…지금이 적기 “뛰는 중국, 엎어진 한국…정치가 문제” Q : 서울대 핵심 싱크탱크 원장 취임 일성이 ‘개헌’인 배경은요. A : “얼마 전 중국 선전(深圳)의 화웨이 공장을 방문했어요. 국가가 장기적인 목표 아래 유망한 기업을 밀어주는 게 확연해 충격을 받았습니다. 우리는 유망 산업 지원조차 정쟁의 대상이 되고 장기 국가 과제 설정은 꿈도 못 꾸잖아요. 과거처럼 10~20년 뒤를 내다보며 국가는 기획하고 사회가 협력하는 시스템이 사라지면서 나라가 활기를 잃고 젊은이들은 좌절한 지 오래입니다. 그 근본 원인은 정치의 실종, 즉 ‘87년 체제’의 파산입니다. 마침 유홍림 서울대 총장의 권유로 전략원장을 맡게 됐는데, 설립 취지가 말 그대로 국가의 미래 전략을 짜는 두뇌 집단이에요. 기후 위기와 인구 감소 해소 등 연구해온 여러 아이템이 있지만, 그런 목표 달성을 뒷받침할 정치 시스템이 붕괴했으니 이것부터 고치자고 결심했어요. (고장 났다면 그 핵심은요?) 대통령제의 한계가 분명해진 것 같아요.” Q : 대통령제의 한계라면요? A : “‘87년 체제’ 초기엔 대통령제가 성공적으로 작동했어요. 노태우·김영삼·김대중 대통령은 북방정책·하나회 숙청·외환위기 극복을 통해 나라를 선진국 반열에 올려놓았죠. 경륜을 검증받은 이들이 대통령이 된 결과인데, 그 뒤 준비 안 되고 정치력도 부족한 이들의 집권이 이어지면서 대통령제의 실패가 분명해진 거죠. 길게는 노무현부터 그런 문제가 시작됐고, 박근혜·문재인 윤석열은 명백히 실패한 대통령들이에요. 대통령이 국가의 자산에서 짐(부채)이 된 겁니다.” Q : 대통령제의 실패는 대통령 개인의 잘못 탓인가요, 제도 자체의 결함 탓인가요. A : “같이 가는 겁니다. 국민은 대통령에 강한 힘을 부여해 나라를 바꿔줄 걸 기대했는데, 대통령들은 그 힘을 엉뚱한 데 쓰니 사고가 난 거죠. 미국 대통령제는 달라요. 도널드 트럼프 집권으로 힘들어진 이들은 멕시코·캐나다·중국 등 외국이지 미국인들이 아니에요. 연방제 국가이고 헌법상 권력이 분산돼 국민 일상은 바뀔 게 적거든요. 반면 우리는 대통령 바뀌면 모든 게 바뀌니 잘못 뽑으면 리스크도 어마어마하게 커지죠.” Q : 우리 헌법 자체의 문제점은 뭔가요. A : “미국을 건국한 국부들(Founding Fathers)은 권력 집중을 가장 경계해 삼권 분립이 확실한 헌법을 만들었어요. 반면 우리는 1948년 제헌 당시 그런 고민 없이 내각제에 가까운 헌법안을 만들었는데, 이승만 박사가 ‘대통령제 아니면 정부에 참여하지 않겠다’고 한 탓에 내각제가 가미된 혼합적 대통령제로 가게 됐죠. 그 뒤 박정희·전두환을 거치면서 대통령에 굉장히 강한 권력이 30년간 축적됐는데 87년에 그 엄청난 대통령 권력은 그대로 두고, 사람만 직선하는 방식으로 개헌한 거죠. 막강한 대통령 권한을 어떻게 조절할 거냐에 대한 고민은 없었어요. 이게 문제죠.” Q : 재판을 5개나 받는 이재명 대표는 거리를 활보하는데 대통령은 구속된 현실을 보면 대통령은 힘없고 당 대표가 센 것 아니냐는 얘기도 있는데요. A : “좋은 지적이에요. ‘87년 체제’ 붕괴엔 야당의 책임도 있어요. 여소야대 구도가 여러 번 있었지만 헌정 체제가 작동한 건 야당이 자제해왔기 때문이에요. 정부를 견제해도 강제력 없는 장관 해임 건의안을 내는 데 그치는 정도였죠. 그런데 요즘 야당은 25만원 지원법 등 자신들이 직접 입법을 하거나, 특정 예산을 제로로 만들고 탄핵을 30번 가까이 했거든요. 대통령 고유의 정책과 인사권에 개입하면서 정권과 국회의 충돌을 ‘관례’로 만들어버린 거예요. 이러니 차기 대선에서 야당이 집권하면 지금 여당도 똑같이 할 겁니다. 나라가 어떻게 되겠습니까.” Q : 야당이 과거와 달리 ‘자제하지 않는 야당’이 된 이유는요. A : “윤석열 대통령이 야당을 끌어안지 못한 탓도 있지만, 야당의 리더십에도 문제가 있는 거죠. 대통령제의 특성은 임기의 고정성입니다. 5년 임기를 채워야 헌정이 유지돼요. 미국만 봐도 탄핵으로 물러난 대통령은 없어요. 하원에서 탄핵안이 통과돼도 상원에서 막았어요. 양원제란 견제 장치에다 야당의 자제도 작용한 거죠. 리처드 닉슨도 자진 사임한 거지, 탄핵당해 물러난 게 아니에요. 그런데 우리는 박근혜 대통령이 탄핵당한 데 이어 윤 대통령까지 탄핵소추를 당했으니 다음 대통령도 취임 당일부터 야권 세력이 탄핵하겠다고 달려들지 않겠어요? 이런 상황에선 권력을 자제할 의지가 분명한 사람이 대통령이 되도 버티기 힘들어요.” “남미 짝 난 한국…정치학자로 자괴감” Q : 87년 체제가 완벽히 고장 난 징후는 언제부터 나타난 건가요. A : “문재인 정부 때부터라고 봐요. 문 정부는 탄핵당해 물러난 박근혜에 이어 박근혜 정부 인사들에다 전전 대통령인 이명박, 양승태 전 대법원장까지 ‘적폐’란 명목으로 사법처리했잖아요. 보수진영엔 보복으로 보일 수밖에 없으니 참기 어려운 거죠. ‘적폐’란 선악을 가르는 것이라 정치에선 금기인데 문 정부가 이걸 내세워 캠페인을 했으니 그 후유증으로 지금의 극단적인 정치가 굳어진 거죠. 김대중 전 대통령은 박정희·전두환 정권 때 두 번이나 죽을 뻔했지만 가해자들을 끌어안고 통합의 정치를 한 결과 첫 수평적 정권 교체에 성공했어요. 그러나 문재인 정부 적폐 청산은 정치적 후유증이 워낙 크다 보니 3년 전 대선에서 보수·진보 진영은 (윤석열·이재명 같은) 싸움꾼들을 내세웠고 박빙으로 승부가 갈린 바람에 정치가 더욱 극단화한 거죠.” Q : 민주화 체제 37년 만에 ‘계엄령 정치’가 튀어나온 데 놀란 이들이 많은데요. A : “정치학계 석학인 후안 린츠 예일대 교수가 1990년 ‘대통령제의 위험성(The Perils of Presidentialism)’이란 논문에서 대통령제에서는 대통령과 의회가 다 정통성이 있는 ‘이원적 정통성(Dual Legitimacy)’이 특징이라 극단적 대립구도가 되면 의회는 대통령을 탄핵하고 대통령은 군을 동원하려는 위험이 생겨날 수 있다’고 했어요. 쿠데타가 빈발하는 남미를 보고 쓴 논문이 한국에 들어맞았으니 학자로서 창피하죠. 린츠의 결론도 마찬가지인데, 결국 대통령의 권력을 분산하는 방법밖에 없어요.” Q : 구상 중인 개헌안 골자가 대통령 권한 분산인가요. A : “그렇죠. 정책은 국회가 선출한 총리가 전담하되 대통령이 국회 해산권을 가져 의회의 독주를 견제한다는 골자입니다. 여담인데 지금처럼 장관들이 일하기 좋은 환경이 없대요. 전에는 장관이 뭐 하나라도 하려고 하면 대통령실이 바로 전화해서 간섭하기 일쑤였는데 지금은 그런 전화가 안 오니까 장관들이 할 일을 하고 있다는 거예요. 이게 정상 아닌가요. 그러려면 대통령 권력 분산이 필수죠.” “이재명·권영세, 개헌 포럼 초청 검토 중” Q : 서울대 전략원에선 개헌 캠페인을 어떻게 전개할 계획인가요. A : “우선 전직 총리·국회의장·헌정회장·당 대표 등 10여 명을 초청해 ‘국가 원로들, 개헌을 말하다’란 타이틀로 포럼을 개최할 겁니다. 이재명·권영세 등 여야 대표들도 초청을 검토 중이에요. 이어 정치학자·헌법학자 세미나를 열고 바람직한 개헌안 윤곽을 모색할 계획인데, 개헌은 최대한 서둘러야 하므로 ‘권력 분산’에만 집중해 원포인트 개헌안을 제시할 생각입니다. (개헌 시점은요?) 대선 일정에 얽매이지 않고 즉각 해야 해요. 늦을수록 나라와 국민의 손해가 막심해지니까요.” Q : 개헌은 원내 1당 민주당과 이재명 대표가 키를 쥐고 있는데 개헌의 ‘개’자도 꺼내지 않고 있습니다. 개헌을 논의하면 대선 일정이 그만큼 늦어진다고 여기기 때문 아닐까요. A : “지금 헌법 체제로 민주당이 집권한다고 칩시다. 보수진영은 그날부터 대선 불복 운동을 벌이고, 야당이 된 국민의힘도 모든 힘을 다해 저항하겠죠. 민주당 정부가 수적 우세를 이용해 강경대응하면 3년 뒤 총선에선 야당이 이길 수도 있어요. 그럼 또 탄핵 정국이 개시될 겁니다. 게다가 요즘 민주당과 이재명 대표 지지율을 보면, 흔들리고 있잖아요. 대선 때 양자 대결이 이뤄지면 민주당이 꼭 이긴다는 보장도 없어요. 결국 지금 가진 것 많은 민주당과 이 대표가 개헌의 결단을 내린다면 국민은 이 대표를 다시 보게 될 겁니다. 민주당 안팎에서도 친명계 빼곤 개헌에 동의하는 분들이 많은 듯하더라고요. 내가 개헌 이야기를 한 지 20년이 넘었는데 지금처럼 공감대가 큰 적이 없어요. 반드시, 그리고 시급히 개헌해야 합니다.” 강찬호(stoncold@joongang.co.kr)

2025-02-04

7년간 뭘 했길래…'188만원→305만원' 국민연금 마법의 비결 [신성식의 레츠 고 9988]

지난달 국민연금이 300만원 넘는 수급자가 처음 나왔다. 수도권에 사는 67세 이모씨다. 지난달 24일 그의 통장에 305만원이 처음 입금됐다. 지난해 10월 기준 국민연금 수급자는 705만 5954명. 이들의 평균 연금이 65만여원(특례·분할연금 제외)이라 이씨의 연금이 더욱 빛을 발한다. 60세 되자 2년 추가 불입 300만원 연금은 다이아몬드급이다. 좀체 나오기 힘들다. 다이아몬드급이 올라서는 데까지 다섯 박자가 맞았다. 고액 보험료, 장기 가입, 임의계속 가입, 물가 상승률 반영, 수령 연기 증액이다. 이씨는 1988년 국민연금 도입부터 2017년까지 30년 가입했다. 만 60세가 되면 더는 가입하지 않아도 된다. 여기서 멈추고 연금을 받았으면 월 188만원(추정치)이 나왔을 것이다. 이씨는 2년 더 보험료를 냈고(임의 계속 가입), 이 덕분에 2020년 1월 약 195만원을 받을 수 있게 됐다. 이씨는 이번에는 멈췄다. 바로 수령하지 않고 5년 연기했다. 국민연금은 화폐 가치 하락을 막기 위해 전년도 소비자 물가상승률(CPI)을 반영해 연금액을 올린다. 이 규정에 따라 2020년 CPI 0.5%가 반영돼 2021년 연금이 196만여원으로 올랐다. 이런 식으로 매년 CPI가 누적 반영됐다. 올 1월엔 지난해 CPI(2.3%)가 반영돼 224만여원으로 올랐다. 여기에 연금 연기의 증액 혜택(36%)이 결정적 역할을 하면서 300만원 고지를 넘게 됐다. 연금 수령을 연기하면 연금액이 월 0.6%(연 7.2%) 더 나오는데, 이씨는 5년 연기한 덕분에 36% 늘었다. 국민연금 305만원 따져보니 32년 최고액 보험료 납부 5년 수령 늦춰 36% 증액 이런 사례 많지는 않을듯 좀 더 자세히 따져보자. 이씨는 1988~2019년 최고 등급의 보험료를 냈다고 한다. 국민연금은 소득 전액에 보험료(9%)를 매기지 않는다. 아무리 소득이 높아도 상한선(올해 617만원)까지만 매긴다. 상한선은 매년 조금씩 오르는데, 88년에는 200만원이었다. 상한선을 두는 이유는 세금이 아니라 사회보험이기 때문이다. 이씨는 가입기간 내내 상한선 보험료를 낸 경우라서 매우 드문 사례라고 할 수 있다. 이씨는 임의계속 가입을 활용했다. 2018년 만 60세가 돼 보험료를 안 내도 되는데 계속 냈다. 직장가입자가 임의계속 가입을 할 경우 자기 소득보다 낮춰서 보험료를 낼 수 없다. 이씨는 2년 최고 보험료를 냈다. 임의계속 가입은 회사가 절반을 대지 않기 때문에 본인이 다 내야 한다. 그런 탓에 국민연금공단은 임의계속 가입을 적극적으로 권하지 않는다. 특히 소득이 높은 직장인이라면 더욱 그렇다. 추가 보험료와 추가 연금을 따지면 남는 게 별로 없다. 다만 연금의 절대 액수는 올라간다. 만약 이씨가 임의계속 가입을 하지 않았으면 300만원 고개를 넘지 못했다. 그렇다고 이씨가 300만원을 넘기려고 임의계속 가입을 한 건 아닌 듯하다. 하다 보니 결과적으로 넘게 된 것으로 추정된다. 전 수급자의 1.8배 오래 가입 이씨는 임의계속 가입을 포함해 32년 가입했다. 보기 드문 장기 가입이다. 지난해 6월 기준으로 신규 수급자의 평균 가입기간은 19.6년(특례·분할연금 제외)이다. 전체 수급자 평균은 17.5년이다. 국민연금공단은 60세에 도달한 가입자에게 이런저런 안내를 한다. 연금 가입 기간이 10년이 안 되면 임의계속 가입을 권유한다. 추가 가입해 10년을 채워서 연금을 받게 한다. 그게 과거 보험료를 일시금으로 찾는 것보다 훨씬 유리하기 때문이다. 또 연금을 받을 때 다른 소득이 있으면 삭감될 수 있다는 점을 알려준다. 올해 기준으로 다른 소득이 308만 9062원 넘으면 연금이 깎인다. 한 사람이 많은 걸 가져가지 말라는 취지에서 삭감한다. 적게는 5만원 미만, 최대 절반 깎인다. 이를 피하는 방법의 하나가 수령 연기라고 연금공단이 안내한다. 평균수명까지 받으면 이득 이씨가 연기를 택하지 않았으면 어떻게 됐을까. 다른 소득이 적어서 삭감되지 않았으면 5년간 1억3368만원을 연금으로 받았을 것이다. 소득이 높아서 절반 깎이면 6684만원을 받았다. 그러나 이씨는 연기를 택했다. 이 덕분에 올 1월 연금이 80만 7350원(36% 증액) 늘었다. 만약 남성 평균수명(80.6세)까지 받는다고 가정하면 1억4129만원 늘어난다. 이래저래 따져봐도 연기한 게 이득이다. 소득이 제법 돼 연금이 삭감될 처지라면 말할 것 없다. 물론 연기를 선택하기 전 본인의 건강 상태를 따지는 게 중요하다. 국민연금 최고액은 그리 팍팍 뛰지 않는 편이다. 2018년 200만원 고개를 넘긴 후 조금씩 올라 2022년 249만원이 됐다. 지난해 10월에는 289만여원 수급자가 최고액이었다. 앞으로 300만원 수급자가 쏟아질 것 같지는 않다. 이씨와 같은 조건을 갖춘 경우가 드물기 때문이다. 1988~98년은 국민연금 수급자 입장에서는 황금기였다. 과거 소득의 얼마를 연금으로 받을지를 결정하는 소득대체율이 70%로 연금 역사상 가장 높았다. 이 기간이 얼마나 들었는지가 중요하다. 이씨는 온전히 거쳤다. 이 기간을 다 거쳐도 보험료가 높지 않았으면 300만원 넘기 쉽지 않다. 게다가 99년부터 소득대체율이 점점 떨어져 올해는 41.5%(2028년부터 40%)이다. 수령 시기를 연기해 액수를 증폭하더라도 한계가 있다. 신성식(ssshin@joongang.co.kr)

2025-02-04

[시론] 초고령화란 ‘회색 코뿔소’ 이젠 멈춰세워야

위험을 감지하고도 간과해 제대로 대응하지 못한 상황을 ‘회색 코뿔소(Gray Rhino)’라 한다. 대한민국의 회색 코뿔소는 이미 오래전에 모습을 드러낸 고령화 문제다. 지난해 12월 말을 기점으로 65세 이상 인구가 전체 인구의 20% 이상인 초고령사회에 진입했다. 세계에서 가장 빠른 속도로 고령화가 진행 중이며, 그 속도는 갈수록 빨라지고 있다. 앞으로 15년간 고령화 속도는 기존의 2배인 매년 약 1%포인트의 속도로 올라갈 전망이다. 20년 후인 2045년이면 한국은 고령 인구 비중이 37.3%로 세계에서 ‘가장 늙은 나라’가 될 전망이다. 지난해 12월 초고령사회 첫 진입 노동력 감소, 연금 고갈 큰 부작용 사회모델 개편과 인식 전환 필요 이처럼 초고속 고령화의 가장 큰 원인은 ‘베이비 부머(Baby Boomer)’의 고령층 진입이 20년에 걸쳐 이뤄지기 때문이다. 일본의 단카이(團塊·덩어리) 세대는 5년 안에 고령층 진입을 마무리했다. 반면 한국의 베이비붐 세대는 장기간 고령층에 진입하면서 고령화에 가속도가 붙는다. 게다가 앞서 진입한 고령자는 후기고령자로 편입돼 25년 뒤에 국민 4명 중 1명은 75세 이상 노인이 된다. 고령화로 인한 노동력 감소, 연금과 사회보험 재정의 고갈은 국가의 근간을 흔드는 위협이다. 생산연령인구 감소는 경제성장을 멈춰 세우고, 의료와 연금 등 사회지출의 폭증은 복지시스템을 붕괴시킬 우려가 크다. 1차 베이비부머(1955~1963년생, 705만명)가 후기고령자 진입을 앞두고 있고, 2차 베이비부머(1964~1974년생, 954만명)의 은퇴가 본격화하는 지금이 마지막 골든타임이다. 이를 위해 국민연금·건강보험·장기요양보험 등을 합리적 수준으로 보장하면서 지속가능성도 갖추도록 고비용·저효율의 사회보장시스템을 혁신해야 한다. 이를 뒷받침할 성장 모델은 고령자 계속고용으로 경제활동인구를 확충하고 K로봇 등 에이지 테크(Age Tech)로 고령친화적 혁신을 추진하며 생산성 위주로 전환해야 한다. 저출산고령사회위원회는 이 방향에 맞춰 지난 1월 23일 돌봄·주거, 고용·소득, 기술·산업 등 3대 분야로 나눈 ‘초고령사회 대응방향’을 발표했다. 가장 시급한 돌봄·주거 분야의 경우 지역사회 중심 통합돌봄체계 강화 방안을 내놨다. 고용·소득과 기술·산업 분야도 순차적으로 정책을 발표할 계획이다. 지역사회 중심 통합돌봄체계 강화방안은 집에서 받는 돌봄서비스를 대폭 늘리고, 집에서 편안한 노후를 보낼 수 있게 주거환경을 개선하며, 시설과 병원 중심의 고비용 돌봄체계를 개선하는 3가지 방안으로 구성된다. 우선 노인 돌봄의 대상을 모든 노인으로 확대하고 재가 장기요양 서비스를 대폭 늘려 이제부터는 살던 곳에서 돌봄을 받을 수 있도록 돕는다. 아파트 중심의 한국 주거문화와 고령자의 수요를 고려해 내 집에서 안전한 노후를 보낼 수 있는 주거환경 구축에도 주력한다. 일정비율 이상의 고령친화주택을 건설할 경우 용적률 상향 등 인센티브를 제공하고 수요가 높은 도심은 용적률을 상한의 1.2배로 더 올린다. 요양병원의 불필요한 사회적 입원을 줄여 의료 필요도가 높지 않으면 집에서 노후를 보낼 수 있도록 요양병원의 기능을 전문화·세분화한다. 수도권 등 높은 땅값으로 요양시설이 부족한 지역은 비영리법인이 토지와 건물을 임차해 요양시설을 운영할 수 있게 허용한다. 향후 발표할 고용·소득 분야는 계속 고용의 여건을 조성하고 정년연장, 노인 기준연령, 연금개혁 등 예민한 문제는 공론화를 거쳐 구체적 개편방안을 모색할 것이다. 기술·산업 분야는 에이지 테크 투자를 확대해 실버경제를 확산하고, 의료·요양 등 돌봄 비용을 절감하는 대책 마련에 주력할 것이다. 이번 대책은 초고령화에 정면 돌파하는 것이 핵심이다. 노인연령, 정년, 사회보험 등 첨예한 이해관계 대립으로 단기간에 결론 내기 어려운 문제도 관계부처, 전문가, 이해관계자 등과 폭넓게 논의해 연내에 발표될 ‘5차 저출산고령사회 기본계획’에 구체적 방안을 담을 방침이다. 이런 대책과 함께 고령층을 ‘능동적 활동 주체’로 바라보는 사회·문화적 인식 전환도 필요하다. 정부와 기업, 모든 국민이 초고령사회 변화를 받아들이고 인식 전환을 실천할 때 우리가 직면한 회색 코뿔소를 멈춰 세울 수 있을 것이다. ※ 외부 필진 기고는 본지의 편집 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주형환 저출산고령화위원회 부위원장

2025-02-04

[천인성의 시선] 반값 등록금 그늘에 갇힌 대학들

“교육부와 정치권이 유치원보다 적은 등록금으로 (대학을) 붙들고 있다.”(염태호 태재대 총장) “비가 새고 화장실 문짝이 떨어져도 다 수리할 수 없을 정도다.”(양오봉 전북대 총장) 지난달 22일 열린 한국대학교육협의회(대교협) 총회의 마지막 행사인 ‘이주호 사회부총리 겸 교육부 장관과의 대화’에서 총장들이 쏟아낸 발언이다. 2009년 이후 계속된 등록금 동결 기조에 대한 불만이 어느 해보다 거셌다. 공교롭게도 이 부총리는 첫 임기 때인 이명박 정부 시절 등록금 인상 여부와 국가장학금 지원을 연계한 ‘반값 등록금’ 정책의 도입을 주도했다. 이 부총리는 “내년엔 대학 사정을 (반영해) 완화할 수 있는 기반을 닦자고 준비 중”이라면서도 “대학이 한해 더 참아달라”고 인상 자제를 요청했다. 반응은 냉담했다. “올릴 수밖에 없는 한계에 와있다”며 인상 의사를 밝히는 총장도 있었다. 등록금 규제 17년에 재정난 가중 서울 대형대학까지 ‘인상 도미노’ 동결만 강요 말고 재정 지원을 등록금 인상 대학에 재정 지원상 불이익을 주는 정부 규제가 등장한 지 17년째인 올해, 대학들이 ‘반란’에 나섰다. 침묵 속에 정부·정치권의 눈치만 보던 10여년 전과는 달리 행동에 나섰다. 지난 4일까지 2025학년도 학부 등록금 인상을 결정한 대학은 총 56곳으로, 전국 4년제대(199곳)의 28.1%에 이른다. 나머지 대학이 등록금심의위 심의를 마무리하는 다음 주엔 80곳 정도로 불어날 듯하다. 이전에도 등록금을 올리는 대학이 일부 있긴 했다. 하지만 대개 정원이 많지 않은 대학, 재정지원에서 소외된 비수도권 대학이라 주목 받지 못했다. 올해는 차원이 다르다. 연세대·고려대·성균관대·한양대·서강대 등 ‘주류’로 불리는 서울 대형 사립대들이 인상을 단행했다. 서울교대·경인교대 등 국립대는 물론 2012년 박원순 당시 서울시장의 주도로 등록금을 깎아 ‘반값 등록금’의 대명사가 됐던 서울시립대도 인상 대열에 합류했다. 16년간 유지된 동결 기조가 왜 올해 흔들리는 걸까. 누군가는 “계엄 사태, 탄핵 정국이 대학가에 가져온 나비 효과”라고 했다. 정국 혼란으로 정부의 ‘그립’이 느슨해지지 않았다면 등록금 인상 대학이 이리 늘지 않았을 거란 얘기다. 올해 법정 인상 한도가 유난히 크기 때문이란 분석도 나온다. 법적으로 등록금은 직전 3개년도 소비자 물가상승률 평균의 1.5배까지 올릴 수 있는데, 대개 2%대를 넘지 않던 한도가 올해 5.49%로 뛰었다. 팬데믹·전쟁의 영향으로 물가가 급등했던 2022년(5.1%)이 한도 산출에 포함된 마지막 해라서다. 계기가 무엇이든 ‘대학 반란’의 근본 원인은 대학을 반값 등록금의 ‘그늘’에 너무 오래 방치했기 때문이다. 2000년대 사립대 등록금이 매년 평균 5% 이상 오르자 청년들의 시위가 이어졌고, 놀란 정부와 표심을 의식한 정치권은 등록금 동결과 국가 장학금 확대를 축으로 한 반값 등록금 정책을 내놨다. 정책이 학비 부담 완화에 어느 정도 기여한 건 사실이다. 하지만 정부가 대학에 반대급부로 약속했던 고등교육 재정 확대는 제대로 이뤄지지 않았다. 2000년대 ‘미친 등록금’이 학생·학부모의 부담을 강요했다면 반값 등록금은 대학의 희생을 담보로 유지됐다. 대교협에 따르면 1인당 연평균 등록금은 2008년 673만원에서 2022년 679만4000원으로 1% 올랐다. 같은 기간 물가 상승을 고려하면 23% 깎인 셈이다. 등록금이 수입의 50~70%를 차지하는 사립대로선 재정난을 피할 수 없다. 그러니 실험·실습시설은 물론 화장실마저 제때 손보기 어려워 “초중고보다 못하다”는 원성이 나온다. 급여를 못 올리니 우수 연구자가 기업이나 외국으로 떠나고 있다. 인력과 시설 확보에 큰돈이 드는 인공지능(AI) 등 첨단 분야 투자는 엄두도 못 낸다. 당연히 교육의 질, 연구 경쟁력 하락은 피하기 어렵다. 2023년 국내 대학의 교육경쟁력은 스위스 국제경영개발원(IMD)이 조사한 60여 개국 중 하위권(49위)에 머물렀다. 등록금 동결 직후(2011년, 39위)보다 10계단 떨어졌다. 저비용으로 고성능 모델을 개발해 세계를 놀라게 한 중국 AI 스타트업 딥시크의 연구자 대부분은 해외 유학 경험이 없는 ‘토종 인재’다. 중국 본토 대학을 갓 졸업했거나 대학 연구소에서 석박사 과정을 밟고 있는 20~30대다. 2018년부터 시작된 중국 정부의 과감한 투자로 대학 역량이 성장한 덕분이다. 동결된 등록금처럼 제자리걸음도 버거운 국내 대학들이 AI 시대에 걸맞은 인재를 배출할 수 있을까. ‘딥시크 쇼크’에 여야 정치인들이 앞다퉈 AI 투자와 인재 육성을 외치고 있다. 특별법 제정, 추경을 운운하기 전에 10년 넘게 동결된 국내 대학의 현실부터 들여다볼 일이다. 천인성(guchi@joongang.co.kr)

2025-02-04

[고영경의 아세안 워치] 소원해진 한-인도네시아 관계, 기술규제 대응 지원으로 풀어야

아세안 최대 경제 규모를 자랑하는 인도네시아의 프라보워 수비안토 대통령이 취임한 지 100일이 지났다. 그 사이 인도네시아는 아세안 국가 중 최초로 브릭스(BRICs) 회원국이 됐다. 이는 2025년 이후 외교·경제 관계에 중대한 영향을 미칠 결정이란 평가다. 특히, 이른바 ‘글로벌 사우스’(Global South·주로 남반구에 위치한 신흥국과 개발도상국)를 견제하려는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재선에 성공한 상황에서 인도네시아의 브릭스 가입은 지정학적으로나 경제적으로 상당한 파급 효과가 있을 전망이다. 1월 브릭스 가입한 인도네시아 다자간 경제협력에 적극 행보 경제 안보 이슈로 접근할 필요 프라보워 대통령은 2024년 10월 취임 직후 러시아 카잔에서 열린 브릭스 정상회의에 외무부 장관을 파견했고, 지난달 인도네시아는 브릭스의 10번째 정회원국으로 승인됐다. 프라보워 대통령은 왜 서둘러 브릭스에 가입했을까. 여기에는 3가지 전략적 고려가 작용했다고 볼 수 있다. 경제 파트너 입지 약해지는 한국 첫째, 조코 위도도(조코위) 전 대통령과의 차별화 전략이다. 군 장성 출신이자 전직 국방부 장관인 그는 조코위 전 대통령과 다른 외교 스타일을 보일 것이라는 예상이 많았다. 실제로 그는 취임 후 100일 동안 중국과 미국·일본·인도 등 9개국을 방문했고, 취임 전부터 따지면 20여개국을 찾았다. 외교 전문지 ‘더 디플로맷(The Diplomat)’은 이를 ‘지위 추구 행동(Status-seeking behavior)’으로 분석했다. 조코위가 실용적이고 비즈니스 중심의 외교를 펼쳤다면, 프라보워는 국제적 지위 향상에 자신의 역량이 우월하다는 점을 인정받으려는 기색이 역력하다. 둘째, 보호무역이 강화되는 시대적 흐름 속에서 다자간 경제 협력의 필요성이 커졌다. 조코위 전 대통령은 2023년 브릭스 정상회의에서 “가입을 서두르지 않겠다”고 밝혔으나, 프라보워 대통령이 직면한 현실은 다르다. 인도네시아의 최대 교역국은 중국이며, 미국·일본·싱가포르·인도가 뒤를 잇는다. 하지만 미국과 유럽연합(EU)의 무역 장벽이 강화되면서 인도네시아는 광물 수출 시장을 다변화하고, 인도 및 남아프리카공화국(남아공)과 협력을 확대하며, 러시아산 원유 수입을 고려하는 등 보다 실용적인 전략을 요구받고 있다. 셋째, 레버리지 극대화 전략이다. 인도네시아는 세계 최대 군도국가로 인구는 2억8000만 명에 이른다. 한국보다 19배나 큰 영토에 2차전지의 핵심 광물인 니켈부터 구리와 보크사이트, 주석, 희토류 등 자원이 풍부하다. 남중국해 문제와 전략광물자원 공급망에서 인도네시아의 전략적 가치는 매우 높다. 하지만 미국과 핵심광물 자유무역협정(FTA)을 체결하지 못한 상태이며, 트럼프 대통령은 브릭스 국가를 견제하며 “달러 대체를 시도하는 국가에는 100% 관세를 부과하겠다”고 선언했다. 인도네시아가 브릭스 가입을 통해 미국과의 협상력을 높이려는 전략을 취하고 있다는 해석이 가능하다. 프라보워는 ‘1000명의 친구도 부족하고, 한 명의 적도 많다’는 속담으로 외교 정책의 기조를 설명했다. 모든 국가와 평화로운 관계를 강조하고 있으나 그의 외교 행보에서 한국은 보이지 않는다. 자국산 부품 사용 제도에 맞춰 삼성전자는 현지에서 스마트폰을 생산하고 있으며, 포스코·LG에너지솔루션·현대자동차·롯데케미칼 등 2300개 이상의 한국 기업이 인도네시아에 진출해 있다. 국내 금융회사도 현지 시장에서 활발히 활동하고 있다. 그럼에도 프라보워 대통령은 취임 후 첫 해외 방문지로 중국과 일본을 선택했으며, 한국 방문은 이뤄지지 않았다. 이러한 흐름이 지속하면, 인도네시아의 경제 파트너가 다변화될수록 한국의 입지는 약화할 위험이 있다. 무역기술 장벽 해소 협력 가능 이런 상황 속 한국의 입지를 강화하기 위해 양국이 공통으로 직면한 경제 안보 이슈를 논의 테이블에 올려야 한다. 특히, 글로벌 통상 및 기술 규제 강화에 대한 공동 대응은 효과적인 전략이 될 수 있다. 최근 무역기술장벽(TBT)과 전략물자 통제, 기술 규제가 강화되면서 무역의 불확실성이 커지고 있다. TBT는 표준, 규격, 인증, 시험 절차 등 각국의 기술 요건이 상이해 무역에 부정적인 영향을 미치는 대표적인 비관세 장벽이다. 특히, 첨단 기술이 경제 안보의 핵심 요소로 떠오르면서 기술 규제와 수출 통제가 더욱 강화되고 있다. 기존에는 군사적 용도로 전용될 가능성이 있는 물품만 전략물자로 지정했지만, 최근에는 반도체와 소프트웨어, 인공지능(AI) 등 핵심 기술 분야까지 포함되는 추세다. 이는 단순한 기술 규제를 넘어 글로벌 공급망과 기업의 수출 전략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치고 있다. 대표적인 사례로 중국에 대한 반도체 및 관련 장비 수출 통제가 있다. 이러한 규제 장벽이 강화되면서 기업이 독자적으로 대응하기 어려운 상황이 발생하고 있으며, 정부 차원의 지원이 필수적이다. 특히, 한국은 수출 강국으로서 무역 규제와 기술 통제에 대비하고 있지만, 많은 개발도상국은 이에 대한 준비가 미흡하다. 미국 역시 아세안 국가들이 무역 관리 규제에 효과적으로 대응하길 기대하고 있다. 한국이 무역기술장벽 해소, 수출 관리 및 기술 규제 지원을 체계화한다면, 인도네시아 기업뿐만 아니라 인도네시아에서 생산한 제품을 해외로 수출하는 한국 기업도 혜택을 받을 수 있다. 이를 통해 아세안 내 역내 공급망을 강화하고, 더 많은 한국 기업이 유리한 투자 및 수출 환경을 확보할 수 있을 것이다. KF-21 분담금 문제로 소원해진 한-인도네시아 관계를 2025년 경제안보 및 통상 이슈 협력으로 풀어가는 것은 어떨까. 고영경 연세대 국제학대학원 디지털통상 연구교수

2025-02-04

[이은혜의 마음 읽기] 문체에 대하여

‘문학적’이라는 말처럼 자의적이고 협소하게 해석되는 단어도 흔치 않다. 최근 어떤 사람이 A의 글에 대해 ‘문학적’이라고 평가했다. 그러고는 자기 글을 그 반대쪽에 위치시켰는데, 해석하자면 A의 글에는 수식어가 많고, 비유를 자주 활용한다는 뜻이었다. 논문만 주로 쓰는 학자 B는 자기 글에 대해 문학처럼 유려하지 않다면서, 누가 문장을 다듬어만 준다면 널리 읽힐 거라고 기대한다. 두 사례에서 보듯 문장은 사유의 핵심으로 여겨지지 않고 도구화된다. 하지만 나는 A의 글을 편집할 때 되도록 수식어와 비유를 덜어낸다. 그게 훨씬 더 문학적으로 여겨지기 때문이다. 그의 글은 꽤 괜찮은 편인데, 경험을 다룸에 있어 회고의 윤리성이 예민하게 발휘되기 때문이다. 글은 과거를 현재로 끌어올 수 있는 강력한 도구이고, 죄책감·수치심·자기 정당화 같은 감정이 곁붙어 오면서 미래의 향방을 결정짓기도 한다. 막힘없는 글은 함정일 수도 우뚝한 문체는 사유의 산물 앎과 경험 축적될 때 깊이 생겨 학자 B가 쓴 글이 잘 안 읽히는 이유 역시 ‘문학적’이지 않아서가 아니다(물론 ‘문학적’이란 말을 엄밀히 사용하면 그의 글은 문학적이지 않아 가독성이 떨어지는 것도 사실이다). 내가 보기에 핵심은 그가 주제에 대한 장악력을 갖지 못한 데 있다. 고층건물 높이의 자료들을 엮는 것은 저자의 뇌에 사유의 집을 짓는 일과 같다. 예컨대 제2차 세계대전에 관해 책을 쓰는 학자들은 여러 기록보관소의 자료에 파묻혀 오랜 시간을 보내는데, 거기에는 언어적 훈련과 역사를 대하는 올바른 관점, 통계 수치와 철자의 오류를 잡아내는 정확한 눈, 듣는 귀, 시대의 정서와 공기를 읽는 공감 능력이 있어야 한다. 역사학자 티머시 스나이더나 지크프리트 크라카워는 내용과 이를 담아내는 문장의 리듬이 뗄 수 없는 관계임을 보여준다. 리듬을 만들어내는 건 박자 감각이 아니다. 리듬은 곧 사유다. 최근 학자 C가 10년 동안 쓴 논문들을 읽었는데, 그는 뛰어난 사상가들의 개념을 끌어와 자신의 분석 대상에 적용하고 있었다. 그의 논문들에 대한 첫인상은 유려하고, 확 끌리며, 아주 쉽다는 것이다. 문득 아리스토텔레스·벤야민·라캉이 이렇게 쉽게 읽히는 게 이상하게 여겨졌다. 내가 이미 읽었던 것도 있어 원 텍스트와 대조해보니 C는 의미의 중층성을 상당히 제거하고 현상에 개념을 끼워 맞추는 식으로 글을 쓰고 있었다. 앞선 사상가들은 우뚝한 산맥인데, 그는 등반할 마음을 먹기보다 산자락 아래서 돌아치고 있었다. 막힘없이 읽히는 글은 그러므로 때로 함정이다. 문체는 높이를 갖는다. 사유는 모순된 것들을 통일하는 가운데 내적 힘을 드러내기 마련인데, 가장 고양된 상태에 이른 사유는 그에 걸맞은 문체로 부려진다. 독일 산문의 우뚝한 봉우리인 니체의 『이 사람을 보라』가 대표적인 예다. 그는 자기 안에서 아폴론적인 것과 디오니소스적인 사유의 싸움이 처절하게 벌어지도록 했고, 이로써 20세기의 한 축을 만들어냈다. 들숨과 날숨이 진부하지 않은 글만이 세기의 전환을 이뤄낼 수 있다. 프루스트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를 해석할 때 키워드는 ‘시간’ ‘배움’ 등이 될 수 있다. 한편 들뢰즈는 프루스트의 문체에도 주목했다. “물질을 정신적인 것으로 만들고 본질에 적합하게 만들” 때 요소들 간의 다툼과 교환을 이뤄내는 것은 다름 아닌 문체라 본 것이다. 게오르기 고스포디노프처럼 시간을 축으로 삼는 뛰어난 소설가에게는 어김없이 ‘동유럽의 프루스트’와 같은 수식어가 뒤따른다. 아마 이는 두툼한 물질인 시간을 정신적 요소인 문장으로 형질 전환시켰기 때문이리라. 문체라는 높이를 이뤄내려는 사람이라면 우선 넓이에 도달해야 할 것이다. 넓이는 조망권을 주기 때문이다. 하늘을 나는 매도 조망능력이 있겠지만, 우리에게는 오히려 수평적 앎과 경험이 내면에 차곡차곡 쌓일 때 수직이 생겨난다. 특히 시간의 작용 속에서 수평의 재료들은 깊이를 갖는 것으로 바뀌며, 때로 초월로 나아간다. 저자가 자신이 다루는 대상을 정확히 알면 글의 내용이 어려워도 독자들은 중도에 이탈하지 않는다. 그의 문체는 누가 다듬어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게 물질에서 정신으로 전환하는 데 핵심 요소이기 때문이며, 이는 글의 전부일 수도 있다. 작가 D는 아는 것이 많다. 그의 글은 정보의 집약이다. 하지만 ‘집약’이란 말과는 어울리지 않게 그의 글은 점성력이 부족하다. 아교로 붙이면 단단해질까 싶어 접속사를 첨가하거나 인과관계의 틀을 만들어보지만 글의 메커니즘은 그런 식으로 생겨나지 않는다. 글 역시 사진처럼 윤곽이 중요하다. 프레임 안에 들이기로 결정한 것은 이 세상에 속하고 테두리 바깥의 것들은 저세상으로 보내진다. 이 세상과 저세상의 구분선은 결을 아름답게 하기 위한 필수 요소다. 말해지지 않은 것은 버려진 것이 아니다. 독자의 상상에 맡겨진 것일 뿐이다. 이은혜 글항아리 편집장

2025-02-04

[노트북을 열며] 킹산직, 킹무직

‘킹산직(킹+생산직)’이 낯선 시절도 있었다. 대졸자라면 넉넉잡아 2000년대 초반까지만 하더라도 관심 밖이었다. 주위에선 취업을 뜯어말렸다. “고졸 생산직을? 굳이? 왜?”. 요즘은 철 지난 얘기다. 주요 대기업 킹산직은 인기 최고다. 2023년 400명을 뽑은 현대차 생산직 채용엔 12만명이 몰렸다(경쟁률 300대 1). 스펙(학점, 영어시험 점수 등 취업 요건) 좋은 대졸자, 대기업 현직자가 줄줄이 지원했다. 예나 지금이나 눈 밝은 사람은 좋은 일자리를 알아본다. 킹산직의 급여·복지는 대기업 사무직 못지않다. 요즘 선호하는 ‘워라밸(일과 삶의 균형)’은 오히려 킹산직이 웬만한 사무직보다 낫다. 중앙일보가 최근 주요 대기업 20여곳의 생산직 처우를 분석한 결과 현대차·LG에너지솔루션·한화케미칼·HD현대인프라코어 등의 초봉이 5000만 원대(성과급 별도), 포스코는 7000만 원대(성과급 포함)에 달했다. 의료비·식대·학자금·복지포인트 등을 제공하는 건 기본. 주택 자금을 지원하거나, 60세 정년퇴직 후 재고용 제도를 운용하는 곳도 있었다. 그러나 킹산직 열풍에 가리운 그늘이 짙다. 먼저, 철저히 대기업만의 리그다. 통계청에 따르면 지난해 9월 기준 국내 전체 취업자의 89%가 중소기업에 다닌다. 소위 ‘쇳밥’ 먹는 중소기업은 생산직으로 일할 청년을 구하지 못해 난리다. (아무리 좋다고 해도) 여전히 같은 회사 대졸 사무직 처우가 생산직보다 나은 것도 사실이다. 돈은 분명 중요하지만, 전부가 아니란 얘기다. 그런데, 사무직의 의문은 꼬리를 문다. ‘일자리로서 생산직이 느리지만 앞으로 나아가는 동안, 사무직은 제자리 걸음 한 건 아닐까’. ‘회사가 자발적으로, 능동적으로 일하는 사무직에게 기회를 주고 성장하도록 하는 데 소홀했던 건 아닐까’. ‘요즘 기업에 야성(野性)이 사라졌다는 탄식이 나오는 것도 사무직 사이에서 직장인의 꿈은 없고, 승진은 꺼리고, ‘조용한 퇴사’만 꿈꾼다는 맥빠진 얘기만 나오는 상황과 맞닿아 있지 않을까’. 과거 인기 드라마 ‘미생’에서 주인공인 고졸 신입사원 장그래가 “슬리퍼는 사무실의 전투화”라고 말한 데 공감한다. 사무실도 현장만큼이나 뜨거운 일터라서다. 한국 기업은 사무직에게 킹산직이 부러워할 만한 성취감과 비전을 심어주고 있나. 뼈를 갈더라도 나와 회사가 함께 성장한다는 자부심으로 일한다는 ‘엔비디아 웨이’에서 배울 점은 없을까. 새해에는 청년에게 희망을 주는 ‘킹무직(킹+사무직)’ 일자리로 가득한 기업이 속속 나오길 기대한다. 슬리퍼를 신고 일해도 가슴이 뛰는. 김기환(khkim@joongang.co.kr)

2025-02-04

[로컬 프리즘] 반복되는 경기도지사 도정 소홀 논란

탄핵·계엄 국면에서 주목받는 정치인 중 하나는 김동연 경기도지사다. 각종 여론조사에서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표에 이어 야권 지지율 2위를 차지하는 등 대선주자로서의 존재감을 드러내고 있다. 김 지사는 출마 여부에 대해 “대선보단 대한민국 위기 극복이 우선”이라며 말을 아끼고 있다. 그러나 지역 정가는 “김 지사가 이미 대선 레이스에 뛰어들었다”고 본다. 그의 SNS는 중앙 정치 이슈로 도배된 지 오래. 도정(道政)으로 가득했던 경기지사 취임 초기의 SNS와 다르다. 지난달 13일 열린 신년 기자간담회에서 김 지사는 “대한민국 비상 경영을 해야 한다”며 ‘수퍼 민생 추경’ ‘트럼프 2기 대응 비상체제 가동’ ‘기업 기 살리기’ 등을 제안했다. 또 “우리 국민의 잠재력 등을 믿는다”고 했다. 2400여 자 분량의 회견문엔 ‘경기도’와 ‘도민’이라는 단어는 하나도 없었다. 경기도와 산하 기관은 정치권 인사들로 채워지고 있다. 비명계로 분류되는 전해철 도정자문위원장과 고영인 경제부지사, 윤준호 정무수석 등이 정무라인에 영입됐다. 산하기관장 자리도 전직 국회의원들이 차지했다. 최근 고(故) 김근태 전 열린우리당 의장의 배우자인 인재근 전 의원이 경기도경제과학진흥원 이사장에 임명됐다. 김민철 전 의원과 김경협 전 의원은 경기도시장상권진흥원장과 이사장으로 취임했고, 여러 전직 의원들이 기관장 내정자로 이름을 올렸다. 경기도의회 국민의힘은 “김 지사가 경기도가 아닌 대선 행보를 위한 인사를 하고 있다”며 “중앙 정치만 바라보느라 경기도를 내팽개치고 있다”고 비난했다. 이어 “대한민국 경제를 걱정하기 전에 경기도 살림살이를 고민하고, 세계 각국의 정부 고위 관계자와 기업 최고 경영자를 만나기보단 도의회와 도내 기업인들의 목소리를 먼저 들어야 한다”고 요구했다. 한 도의원은 “김 지사의 인사나 최근 발언 등을 보면 경기지사라는 생각이 들지 않는다”고 꼬집었다. 김 지사 측은 “단 한 번도 도정에 소홀했던 적 없다”고 반박했다. “대한민국의 정치와 경제가 나아지면 경기도의 문제도 함께 해결되기 때문에 대한민국의 위기 극복이 우선돼야 한다는 것”이 경기도 관계자의 설명이다. ‘도정 소홀’ 논란은 역대 경기지사들이 모두 겪었던 일이다. 최다 인구 광역지자체의 단체장인 경기지사는 당선과 함께 곧장 대선 ‘잠룡’이 된다. “도정보다 대선에 더 신경을 쓴다”는 지적은 단골 공격중 하나다. 김 지사도 경기지사직을 대권으로 가는 디딤돌로 여긴 전임자의 전철을 밟는 셈이다. 그렇다고 정치공세로 흘려들어선 안 된다. 혼란스런 정국이 이어지면서 그만큼 단체장의 역할이 중요해졌다. 다른 어느 때보다도 1400만 경기도민을 위한 도정에 최선을 다해야 할 때다. 최모란(choi.moran@joongang.co.kr)

2025-02-04

[비하인드컷] 37살 고양이 앙주의 위로

올해 11살 된 고양이와 살다 보니 영화·드라마 속 노령묘가 남의 집 이야기 같지 않다. 지난달 개봉한 일본·프랑스 합작 애니메이션 ‘고스트캣 앙주(이하 앙주)’는 무려 37살 아저씨 고양이 앙주가 주인공. 시골 절집에 거둬져 오래 살다 보니, 사람처럼 말하고 걷는 고양이 요괴가 됐다. 절집 대소사를 거들고, 마을 어르신들 마사지 아르바이트까지 하는 앙주의 진가는 도시에서 온 11살 소녀 카린을 만나며 본격적으로 드러난다. 사실 카린은 절집의 외아들 테츠야의 딸. 카린의 엄마가 일찍 세상을 떠나고, 사채 빚 독촉까지 시달리자, 테츠야가 거의 연을 끊고 살던 고향집에 카린을 맡기러 온 것이다. 곁에 없는 부모 대신, 새침한 카린을 비뚤어지지 않게 지키는 역할을 앙주가 도맡는다. 가령 사람 눈엔 안 보이는 가난 신이 들러붙지 않게 쫓아내거나 저승에 있는 카린의 엄마를 잠시 만나게 해준다. 반려묘를 둔 입장에선, 이쪽이 오히려 실감나게 다가왔다. 밥 짓고 청소하는 고양이는 만화밖에 없지만, 뜻밖의 위안을 주는 순간은 현실에도 차고 넘치니까. 도무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없는 표정으로, 따뜻한 체온을 맞대고 하염없이 그저 곁을 지켜주는 방식으로 말이다. 팍팍한 각자도생 세상에서, 삶이 지속되게 하는 건 어쩌면 이렇게 생계와 관계 없이 마음이 채워지는 순간이다. ‘앙주’는 애니메이션으론 드물게 지난해 칸영화제 감독주간에 초청됐다. 간혹 돈도 많이 드는데 나이든 고양이는 왜 기르느냐고, 지나가는 말처럼 무심코 던지는 이들에게 이 영화 해외평을 하나 전한다. “이상한데, 따뜻합니다.” 나이든 고양이의 매력이기도 하다. 나원정(na.wonjeong@joongang.co.kr)

2025-02-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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